에필로그

중학생 글쓰기 프로그램을 기획 중이다. 혼자 하기에 막막한 감이 있어 관련 강좌를 하나 찾아 들었다. 강사는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써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옳은 말이다. 내가 직접 써 봐야 아이들에게 글쓰기에 앞서 어떤 팁을 먼저 주어야 할지, 아이들이 어떤 대목에서 힘들어하게 될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첫 과제의 주제가 나왔다. 바로 내 인생의 화양연화였다.
아들을 등교시키고 커피 한 잔을 진하게 내려 나의 퀘렌시아 에어리어로 들어갔다. 하루 중 가장 여유롭고, 행복하고, 오롯이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 하늘과 구름과 햇살과 바람과 그리고 커피, 나의 초록이들 곁에 앉아 가만가만 내 머릿속 저장고를 더듬어 보았다.
내 삶은 과연 어디서 환하게 꽃 피었던가. 꽃 피긴 했었나? 사회적으로 가장 잘 나가던 때가 화양연화인가? 사랑 속에서 충만하던 때가 화양연화인가? 별일없이 살던 때가 화양연화인가? 뜻하던 바를 이루어 성취감에 떨리던 순간이 화양연화인가?
몇몇의 장면이 스치듯 떠올랐으나, 이내 저어버렸다. 어떤 기억은 지금의 내가 보기에 그 시절의 내가 너무 오만하고 미숙하여 싫었고, 또 어떤 기억은 아직 그로 인한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아 그 시절을 화양연화로 지정해 버리면 지금의 내가 너무 불행해지는 것 같아 싫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지나쳤는데 내가 못 알아본 것일까?
그러다 눈이 머문 곳이 아레카야자이다. 딱 세 줄기 남았다. 새 순 아닌 것이 세 줄기 남았다는 뜻이다. 일 년 가까이 새 순을 밀어올리던 아레카야자는 언제부턴가 기존의 있던 줄기들을 스스로 누렇게 말려 죽이기 시작했다. 나는 주로 그 줄기들이 완전히 말라 뒤틀어지길 기다렸다가 잘라 주곤 하였는데, 이번엔 느낌이 좀 심상찮다. 다른 어린 잎들이 모두 너무 가늘고, 색도 진하지 않은 상태인데 벌써 끝이 마를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레카야자를 위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묵은 잎을 잘라 새 순들에게 물과 영양을 밀어 줄 것인가, 모든 생명이 그렇듯 아레카야자의 자생력을 믿고 기다려 주는 것이 옳은 것일까?
8년 전, 노을이 참 이뻤던 동대문구의 한 아파트 서향의 베란다에서 나는 한번 죽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의 얼굴로 들였던 꿈같던 나의 정원과 함께 나도 죽었다. 그때 내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나는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2년 뒤 첫 아이를 출산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육아를 시어머니와 시누에게 맡길 요량으로 시댁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근처에 살던 시누는 회사를 그만 두고, 시어머니는 젊고 똑똑한 며느리에게 지청구를 듣게 될까 두려운 마음에 베이비시어터 자격증을 따고 기다리고 있었다. 두 분이 번갈아 나의 아이를 돌보는 대신 나는 베이비시어터에게 지출되는 금액만큼의 돈을 지불하고 계속 일을 하기로 한 터였다. 아니, 그러기로 했다고 통고를 받았다.
동대문구의 30년도 더 된 30평 남짓한 아파트였다. 전세로 얻어 들어갔으나 집을 얻으면서 시댁의 눈총을 꽤 받아야 했다. 시부모님보다 좋은 아파트를 얻었다는 게 시댁의 눈총을 산 이유였다. 젊은 애들이 넓은 집 산다고, 시아버지는 대놓고 언짢아 하셨다. 워낙 검소한 집안이라 그러려니 했다.
이사를 하고 딱 일주일 뒤, 남편은 그날도 거나하게 취해 새벽 두 시경 귀가를 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모유 수유를 위해 4시간 간격으로 쪽잠을 자던 시기였다. 당시 남편의 회사가 부도 위기에 있어 남편은 근 반 년째 술에 쩔어 늦은 퇴근을 하고 있었다. 안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잠이 간절하고 또 간절하던 때였다. 아이가 자는 동안 악착같이 자 둬야 했던 시절이었다.
남편은 안방문을 열고 들어와 기어코 나를 깨웠다. 자고 싶다는 내 손목을 끌고 거실로 나왔다. 입에서, 몸에서 술 냄새 풀풀 풍겼다. 나는 어지러웠다. 그의 체중을 내 몸으로 감당하기가 힘들어 손목을 뿌리쳤던 것 같다. 다시 남편이 매달렸다.
“제발”
내 입에서 짜증스런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기어코 그 말을 하고 말았다.
“이제 좀 그만 하면 안 돼? 회사 일 그런 거 어제오늘 일 아니잖아.”
짧은 순간, 남편의 눈에서 섬뜩한 빛이 스쳤다. 그리고 남편은 손에 잡히는 대로 세간을 모두 부수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연애 1년, 신혼 2년, 남편은 나를 여신님이라 불렀다. 수줍음이 많아 데이트 신청을 하면서도 벌벌 떨었고, 눈을 잘 못 마주쳤다. 둘 다 중년이라 불려도 좋을 나이에 만났으나, 손 잡는 데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매사 내 의견을 자신의 의견 앞에 두었다. 벌레 한 마리 못 죽일 사람이라고 나는 떠들고 다녔다.
그런 그가 식탁 의자를 들어 바닥에 내리 꽂았다. 다리가 부러져 나간 의자를 티비를 향해 집어 던졌다. 내 시선이 부러진 의자를 따라가는 사이 내 얼굴 옆으로 무언가 스쳐 벽에 부딪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짐승처럼 표효하며 그는 살면서 내가 들어 본 가장 끔찍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소설에는 발단-전개-절정-위기-결말이 있다. 모든 글에도 기승전결이 있지 않은가.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갈등이 일어나기 위한 배경이 있고, 전조가 있고, 갈등이 번목되어 커지고 커지다 폭발하게 되는 게 정석이다. 그런데 아무런 징조도,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파리 한 마리 못 죽일 것처럼 보이던 그 순한 사람 안에 어떻게 저런 화와 에너지와 끔찍한 말들이 숨어 있었던가.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안방으로 뛰어들어가 문을 잠궜다. 바닥에 뉘여 놓은 아이는 다행히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밖에선 퍽퍽우지끈 쨍그랑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남편은 내가 살면서 들어 본 중 가장 상스럽고 가장 천한 말들을 짐승처럼 표효하며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귀를 막고 아이 위에 우산처럼 몸을 둥글게 말아 엎드렸다.
도움을 청해야 했다. 나와 잘 알거나 친한 이들은 모두 서울의 남서쪽이나 파주 근처에 살았다. 그 새벽에 전화한들 그 누가 동대문구까지 달려와 줄 수 있을까. 나는 한 손을 뻗어 핸드폰으로 시댁 번호를 눌렀다. 참으로 안타까운 선택이었다.
#이건나의해방일지 #쓰고나면해방이될까 #두번째쓰는데도살이떨려 #입으로뱉지못한말이글이될까